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십자군 전쟁/연표/1199년 이후 (문단 편집) === 알비 십자군 === * [[1209년]] : 부르고뉴 공 외드 3세, 느베르 백작 에르베 등이 알비 십자군 주도 / 미카일 앙겔로스, 앙리에게 복속. 친왕 칭호 * 1월 6일 : 데메트르, 앙리의 주관 하에 테살로니카 국왕으로 대관식 거행[* 움베르토는 섭정직 유지했으나 곧 반역 혐의로 체포되어 감금되고 앙리의 동생 외스타슈가 섭정 등극. 앙리, 롬바르드 파벌로부터 세레스 점령.] * 3월 : 슈파이어 조약. 교황 인노첸시오 3세, 오토 4세의 정통성 인정 / 앙리, 테살리아 반란 진압하고 라리사 점령 * 5월 1-2일 : 라베니카 의회. 아카이아의 지오프리와 아테네의 외드, 앙리에게 봉신 서약[* 라미아 근처에 60여명의 제후들 모임. 마침 그해 초엽 기욤 드 셩플리트의 후계자이자 사촌인 로베르 사망. 앙리, 아카이아 공국을 직할 봉토로 삼음. 한편 롬바르드 파벌 지지한 대가로 템플러에게 주어졌던 라베니카와 시도니오스 성채 몰수됨] * 5월 8일 : 앙리, 롬바르드 파벌이 피신한 테베 점령. 아테네 향함[* 섭정 움베르토, 재판 피해 에우보이아 영주 라바노 델레 카르체리에게로 망명했으나 앙리는 추격해와 끝내 둘다 복속시킴. 이에 에피로스의 미카일 역시 복속해옴. 에피로스 남부 통치권 인정받음] * 6월 : 아카이아 공 지오프리, 사피엔차 섬에서 베네치아와 동맹 체결 [* 본래 모레아 전부가 베네치아에 할당되었음으로 형식상으로나마 그 봉신 자처, 베네치아의 모돈 및 코로네 지배 인정] / 알비 십자군, 리옹에 집결[* 보르도 대주교가 이끄는 제2군은 케르시 경유하여 랑그도크 향함] * 6월 18일 : 레몽 6세, 생 질에서 교황 특사 밀로 앞에서 공개적으로 참회.[* 밀로가 지켜보는 앞에서 공개 채찍질 받음. 토마스 베켓 살해 이후 헨리 2세의 참회와 같은 방식] * 6월 22일 : 레몽 6세, 용서받고 알비 십자군 동참 * 7월 : 알비 자작 로제르. 가톨릭 신앙 드러내며 십자군 측과의 협상하나 완전 복속 요구에 반발 * 7월 21일 : 십자군, 베지에 당도. 로제르, 일부 카타리파 및 유대인과 카르카손 향함 * 7월 22일 : 십자군, 베지에 함락. 가톨릭과 카타리파 불문 7천 시민 학살됨[* 2만여 십자군이 베지에 포위하자 그 주교가 십자군과 협상. 십자군이 카타리파 모두 양도할 것을 요구하자 222명의 명단 작성해 보냄. 하지만 시내 지도부가 인도 거부. 이에 십자군의 시토회 수도원장은 가톨릭교도들은 학살 피하도록 성밖으로 나올 것을 요구하나 대부분의 시민들은 십자군 불신, 성 안이 안전하다 여김. 주교와 일부 신도들만 성 나옴. 이후 함락되자 알비 십자군 이끈 교황 특사 아르노 아모리는 '모두 죽여라. 신께서 구별하실 것이다'라는 명언을 남김] * 7월 26일 : 십자군, 항복해온 영주들과 베지에 떠나 카르카손 향함 * 8월 1일 : 십자군, 카르카손 당도 * 8월 3일 : 십자군, 카르카손 외곽의 부르와 강변 장악. 시내로의 식수 차단 * 8월 6일 : 아라곤 국왕 페드로 2세, 중재 실패하고 귀국 * 8월 7일 : 십자군, 카르카손 외성 진입하나 격퇴됨 * 8월 14일 : 십자군측 기사 30명이 협상 제안, 로제르가 응하나 인질로 잡힘 * 8월 15일 : '''카르카손''', 십자군에 항복[* 알비 십자군을 대표하는 삽화 중 하나인 알몸으로 성을 나서는 시민들이 바로 이때를 묘사한 것. 시민들 재산권 박탈되고 무일푼으로 쫓겨남] / 프리드리히, 메시나에서 페드로 2세의 여동생 콩스탕스와 결혼 * 8월 말 : 시몽 드 몽포르, 교황 특사단에게서 알비 자작 수여받고 십자군 지휘. 레몽 6세 등 다수 귀환[* 레몽 6세는 규율상으로 요구되는 40일 종군 채워진 직후 이탈. 그의 영지 노리는 시몽의 부추김 있었다고도. 한편 부르고뉴 공과 대립하던 느베르 백작은 부르고뉴측 봉신인 시몽의 명령받길 거부하고 역시 이탈. 늦가을까지 시몽에게 남은 기사는 46명] * 9월 : 교황 특사 밀로, 레몽 6세가 참전 약속 어겼다고 보고 * 9월 6일 : 아비뇽 공의회. 이단과 유대인 대한 21개 조항 규정 * 10월 21일 : 오토 4세, 로마에서 신성로마제국 황제로 대관식 거행 * 11월 : 교황 인노첸시오 3세, 잉글랜드 국왕 존 파문 * 11월 10일 : 알비 자작 로제르, 카르카손에서 옥사. 랑그도크 반란 * 12월 : 카바레 영주 피에르, 십자군의 포위 격퇴 * [[1210년]] : 봄. 필리프 2세, 예루살렘 왕으로 장 드 브리엔 결정 / [[프란치스코회]] 설립됨 / 미카일, 테살로니카 왕국 침공[* 가을 무렵 앙리가 테살로니카 당도하자 그에게 재차 봉신 서약 / 필리프 2세, 샹파뉴의 장 드 브리엔을 예루살렘 여왕 마리의 부군으로 선택. 교황과 함께 지참금 마련해줌 / 키프로스 국왕 위그 1세가 15세 성년 이르자 섭정 고티에 드 몽벨리아르 물러남. 하지만 얼마후 횡령 혐의로 추방됨] * 1월 : 레몽 6세, 로마 당도. 밀로의 추궁 반박, 파문 및 영지 압수 철회됨[* 애초에 중세 봉건 사회에서 영지 압수는 교황이나 십자군이 아닌 주군인 필리프 2세의 권한. 한편 이후 밀로가 사망. 교황은 그의 후임으로 테오도시오 파견. 다른 특사 위그 드 레이츠는 ?] * 2월 : 시몽, 라스투르 공격하나 격퇴됨 / 코린트, 아카이아 공 지오프리에게 항복[* 수비대장 테오도로스 앙겔로스는 아르타의 형 미카일에게로 피신. 지오프리 드 발라르두앵, 안드라비다 의회에서 봉신들로부터 아카이아 왕공으로 추대됨. 지오프리, 공국을 12개 봉토로 분할하고 파트라스와 코린트 대주교 하에 서방 교회 주교구 설립. 그의 부인이 후계자인 아들 지오프리와 샹파뉴로부터 당도] * 3월 : 시몽의 부인 알리스, 지원군과 당도. 십자군, 브람 함락. 1백의 카타리파 불구되어 라스투르 향함[* 코 베이고 입술 잘리고 눈 도려낸 상태로. 오직 1명만 눈 하나 남겨 무리 인도하게함. 한편 알리스와 함께인지는 모르겠지만 드뢰 백작과 퐁티외 백작이 십자군 합류] * 5월 2일 : 2차 라베니카 의회. 라틴 제국의 성직자 대한 특권 보장.[* 토지세 납부 외에는 세속법에 구애받지 않음. 다만 십일조와 세습 (서임권)등은 분쟁의 소지로 남음. 이번엔 지오프리 드 발라르두앵 불참] * 6월 초 : 몽레알 회담. 랑그도크 영주들, 보호 대가로 아라곤의 페드로 2세에게 복속 * 6월 15일 : 시몽, 미네르브 포위 * 6월 20일 : 에피로스의 미카일, 베네치아에 복속. 40 히페르페라 조공 및 무역 특혜 제공 대가로 용병 얻음 * 6월 27일 : 미네르브 수비대, 십자군 측 투석기 방화 시도하나 실패 * 7월 : 알 아딜, 십자군에 휴전 연장 제안. 장 드 브리엔의 동의 구하자는 템플기사단장 주장으로 거절됨[* 섭정 장 드 이벨린과 구호기사단장, 튜튼기사단장은 평화 연장에 동의했으나 결국 템플기사단장 필립의 다음 왕의 결정권 제한하지 말자는 주장에 설득됨. 이에 알 아딜은 아들 알 무아잠에게 아크레 인근 습격하게함] * 7월 22일 : 미네르브, 십자군에 항복. 개종 거부한 140명의 카타리파 화형됨, 도시 폐허화 * 7월 말 : 봉타주 영주, 미네르브에서 시몽에게 항복. 시몽, 봉타주 성채 파괴 * 8월 1일 : 시몽, 카르카손 서남쪽의 테름 포위 * 9월 : 생 질 공의회. 교황 특사단, 레몽 6세 소환하여 재차 파문[* 레몽, 출석 거부하고 자신이 피에르 드 카스텔누의 살해와 관련 없다는 증거 제시하나 레몽에게 적대적인 사제들은 그가 이단과의 전쟁에 소극적이라는 것을 내세워 파문시킴 --답정너--] * 9월 13일 : 장 드 브리엔, 3백의 기사 및 은괴 18kg과 아크레 당도. * 9월 14일 : 예루살렘의 마리아, 장 드 브리엔과 결혼 (각각 18세, 60세) * 10월 3일 : 장 드 브리엔, 티레에서 예루살렘 국왕으로 대관식 거행[* 10월 30일이라는 기록도. 섭정이던 장 드 이벨린은 내무대신으로서 권력 어느정도 유지. 대관식 하는 틈에 알 무아잠이 습격. 장 드 브리엔, 아크레 돌아간 후 보복으로 습격] * 11월 18일 : 교황 인노첸시오 3세, 신성로마제국 황제 오토 4세 파문 * 11월 23일 : 시몽, 테름 영주 사로잡고 항복 받음.[* 사로잡힌 영주는 3년 후 카르카손에서 옥사] * 11월 말 : 시몽, 3일간 포위 끝에 뷔베흐 함락. 영주 베르나르, 가족과 도주 / 두포르 영주 기욤 영지 압수됨 * 12월 : 에피로스의 미카일, 테살로니카의 대원수 아마데오 십자가형에 처함. 이후 살로나 점령 * 12월 20일 : 필리프 2세, 파리에서 카타리파 사제 애므리 드 베네의 제자들 화형시킴 * [[1211년]] : 몽쥐 완전 파괴, 라 그라브 수비대 학살됨 / 베네치아, 크레타 정복 시작 / 여름. 십자군, 다미에타 인근 습격[* 기사단들의 주도해 나일 강 하구 공격하지만 결국 철수, 보복으로 아크레 습격당함 / 인노첸시오 3세, 이탈리아 원정 온 오토 4세의 후방에서 반란 선동해 아풀리아 원정 포기하고 철수하게 만듦. 프리드리히 2세와 협상, 테라 디 라보로 (가에타 ~ 카푸아 일대) 교황령에 할양하고 황제가 되는 즉시 시칠리아 왕국을 1살 아들 하인리히에게 넘긴다는 조건으로 동맹 성사됨 / 여름. 에스토니아 인들이 리보니아 기사단의 현지 동맹인 투라이다의 카우포 공격하나 격퇴됨. 이후 기사단이 에스토니아의 빌잔디 요새 공격하나 역시 격퇴됨 / 가을. 시몽 드 몽포르, 복무 기간 다 된 십자군 귀환하자 툴루즈 공격 포기하고 케르시로 북상해 현지 이단 찾아나섬 / 아라곤의 페드로 2세, 교황에게 시몽 드 몽포르가 사리사욕 위해 십자군 남용하고 있으며, 조카이자 검증된 가톨릭 교도인 레몽 6세의 아들 레몽을 툴루즈 백국 주어야 한다고 설득. 연말 무렵. 교황 인노첸시오 3세, 그가 이듬해 안달루스 원정 나설 수 있도록 알비 십자군 모집 잠정 중단] * 1월 : 레몽 6세, 아라곤의 페드로 2세 중재 하에 나르본에서 시몽 드 몽포르와 회동[* 페드로 2세, 자신의 조카 레몽 7세의 계승 좌절된 것에 불만이었지만 시몽의 봉신 서약 승인함] * 2월 : 몽펠리에 공의회. 교황 인노첸시오 3세, 레몽 6세 재차 파문 * 2월 11일 : 보릴, 터르노보 공의회 결과 성문화. 불가리아 정교회 * 3월 초 : 카바레 영주 피에르, 십자군에 항복 * 3월 26일 : 포르투갈 국왕 산초 1세 사망. 아들 아폰수 2세 즉위 * 4월 : 시몽, 라보르 포위 / 보릴, 테살로니카에서 콘스탄티노폴리스 향하던 앙리 기습 시도하나 실패[* 앙리, 정보 입수하고 인근 성채에 군대 집결시키자 보릴 철수. 한편 보릴의 동생이자 마케도니아의 부왕인 스트레츠가 테살로니카 왕국 침공했으나 에피로스의 미카일이 개입해 격퇴됨] * 4월 21일 :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 대성당 완공됨 * 5월 3일 : 라보르 함락. 4백명의 카타리파 화형됨[* 여성주는 우물에 던져진 후 비명 멈출 때까지 돌 부음. 90여명의 기사들 교수형당함. 1명 개종, 나머지는 찬송가 부르며 화형장 향함. 30명 처형되었다는 기록도] * 6월 : 비톨라 전투. 에피로스의 미카일, 보릴의 불가리아 군 격파 * 6월 16일 : 시몽, 툴루즈 포위 * 6월 17일 : 메안데르의 안티오크 전투. 테오도로스 1세, 룸 셀주크 군대 격파. 술탄 카이쿠스라우 1세 전사, 알렉시오스 3세 사로잡힘[* 에피로스에서 니케아로 와서 황위 요구했으나 거절당한 후 콘야로 망명해온 알렉시오스 3세와 그의 조카 마누일 (이사키오스 2세의 막내아들) 복위를 명분으로 메안데르의 안티오크 포위. 이에 테오도로스는 라틴 용병들이 반을 차지하는 군대 편성하여 맞섬. 전세는 셀주크 측에 유리했으나 술탄이 말에서 내려 니케아 군대 추격하던 중 아마도 테오도로스 1세 본인에게 살해됨. 이에 룸 셀주크 군대 도주. 마누일과 함께 사로잡힌 알렉시오스 3세는 히아신토스 수도원으로 보내짐. 한편 콘야에서 아미르들이 모여 장남 이즈 앗 딘 카이카우스 추대. 토카트의 알라 앗 딘 카이쿠바드와 안탈리야의 카이페리둔 이브라힘의 두 이복동생들 반란. 아르메니아의 레오와 다니슈멘드의 자히르 앗 딘 일리, 에르주름의 아미르 무기트 앗 딘 토그릴샤 등이 이브라힘 지지하여 콘야 입성하나 카이카우스의 설득에 해산. 이에 카이쿠바드는 앙카라로 도주, 카스타모니 튀르크의 도움 받아 버티나 결국 두 동생 모두 사로잡힘. 카이카우스, 동로마 측과 현상유지 평화 체결. 테오도로스 1세는 라틴 제국 쪽에 집중, 그리스인들에게 구원 약속하는 편지 보냄] * 6월 29일 : 시몽, 보급품 부족으로 툴루즈 포위 풀고 철수 * 6-7월 :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 토마스 사망. 베네치아 출신 필리포 선출됨, 비베네치아계 사제들 반발[* 먼저 비베네치아계 사제들이 성 소피아 성당 모여 교황의 자유 선거 편지 제시. 하지만 그들이 떠난 후 베네치아 출신 사제들이 모여 그들의 주임 사제 필리포를 총대주교로 추대. 이에 비베네치아계 사제들이 교황에게 자신들 중 유력자들 명단 적어 선택해달라고 요청] * 8월 25일 : 교황 인노첸시오 3세, 총대주교 재선거 명령 * 9월 : 레몽 6세, 푸아 백작 로제르와 카스텔노다리의 시몽 포위하나 격퇴됨 * 10월 : 보릴, 테살로니카 포위하나 격퇴됨[* 알렉시오스 슬라브가 구원하고 보릴의 부관 멜닉 사로잡음] / 테오도로스 1세, 라틴령 비티니아 침공. 피에르 드 브레시보 전사시킴[* 추정 시기. 이에 앙리는 250명의 기사와 2천 보병과 함께 헬레스폰트 상륙] * 10월 15일 : 페가이 전투. 앙리, 린다쿠스 강가에서 테오도로스 1세 격파. 소아시아 진군[* 이미 안티오크 전투에서 라틴 용병대 다수 상실한 상태라 패배. 테오도로스의 동생들 알렉시오스 혹은 이사키오스 사로잡힘. 이후 앙리는 미시아 지방 정복 나섬. 그 과정에서 렌티아나 점령, 수비대장이자 테오도로스의 사위인 안드로니코스 팔라이올로고스 사로잡음. 앙리, 포이만니온과 아드라미티온 점령하고 그리스 포로들을 국경에 배치함] * 10월 19일 : 교황 인노첸시오 3세, 리가 대주교 알브레히트의 리보니아 기사단 국가화 승인 * 12월 24일 : 총대주교 재선거 결과 베네치아 측은 루도비코, 비베네치아 측은 제르바시오 선출. 서로 교황에게 탄원 * [[1212년]] : 스트라스부르 종교재판. 80여명의 카타리파 신도 대부분 화형됨 / 무와히드 칼리파 앗 나시르, 살바티에라 함락[* 1209년이란 기록도. 칼라트라바 기사단의 2번째 거점. 이에 카스티야 국왕 알폰소 8세가 반격 나섬, 아라곤 국왕 페드로 2세가 도움. 교황 인노첸시오 3세, 그들 도울 십자군 선포하고 이를 조직하도록 알비 십자군 이끌던 아르노 애므리를 교황 특사로 임명 / 베네치아, 몰타 출신 제노바인 해적 엔리코 페스카토레로부터 크레타 정복 / 테오도로스 1세, 첫 부인 안나 앙겔로스 사망하자 아르메니아 레오 1세의 조카 필리파와 재혼 / 울리히-클레베 공작, 독일 십자군 이끌고 랑그도크 향함. 파리 부주교 역시 지원병 이끌고 시몽 합류 / 여름. 프리드리히 2세, 독일 향하기 위해 북상. 북이탈리아의 오토 4세 (벨프 가문) 지지하는 현지 구엘프 도시들 복속시킴. 2차 구엘프-기벨린 전쟁의 기원] * 1월 : 앙리, 페르가몬 점령 / 앙리의 동생 외스타슈, 보릴의 침공 격퇴[* 이후 러시아로 도피했던 사촌 이반 아센이 슬라브 용병과 불가리아로 돌아와 내전 터지자 라틴 제국에게 평화 요청. 한편 앙리는 1월경 포이만니온에서 교황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그의 모든 적들이 소멸했다고 표현] * 1-2월 : 아카이아 공국, 아르고스 점령 * 4월 : 예루살렘 여왕 마리아, 딸 이사벨라 출산 후유증으로 사망. 장 드 브리엔, 이사벨라 섭정 자처[* 이무렵 시몽 드 몽포르가 알비 점령했다 한다.] * 4월 8일 : 알비 십자군, 우트폴 포위 * 4월 11일 : 우트풀 주민들 도주, 십자군의 추격 * 4월 12일 : 알비 십자군, 버려진 우트폴에 방화 * 5월 : 시몽, 케일뤼스에서 카타리파 군대 격파 / 12세 목동 에티엔 드 클루아, 소년 십자군 모집[* 먼저 생 드니의 필리프 2세 찾아가 자신에게 십자군 설교하라는 그리스도의 편지 받았다고 주장. 이에 필리프는 집으로 돌아가라 하지만 그는 굴하지 않고 성당 앞에서 지중해까지 행군하면 기적 발현할 것이라며 모병. 일부는 프랑스 국왕기 모조해 모으기도] * 5월 2일 : 아르노 아모리, 나르본 대주교 등극 * 5-6월 : 에피로스의 미카일, 라리사 점령. 라틴 사제들 추방 / 독일의 니콜라스, 쾰른의 동방박사 성묘에서 소년 십자군 설교[* 이교도들을 개종시켜야 한다고 주장. 라인강 일대에서 인원 모아 두 무리로 나눔. 니콜라스, 첫번째 무리 이끌고 앞장서 남하. 바젤 지나 제노바 향함] * 6월 3일 : 시몽, 펜느 포위 * 6월 말 : 루아르 유역 소년 십자군, 방돔 집결. 에티엔 필두로 마르세유 향해 남하[* 에티엔은 마차 타고, 부유한 소년들은 말타고. 소수의 가난한 사제들과 나이든 순례객들 동행. 하지만 더운 여름 날씨로 숫자 감소] * 7월 : 장 드 브리엔, 알 아딜과 5년간 휴전 체결[* 장 드 브리엔, 교황에게 사절 파견해 1217년 7월 휴전 끝나면 바로 성지에 당도할 새로운 십자군 요청.] * 7월 16일 : [[나바스 데 톨로사 전투]]. 카스티야-아라곤-포르투갈 연합군, 무와히드 군대 대파 * 7월 25일 : 펜느, 시몽에게 항복 * 8월 : 에티엔의 소년 십자군, 마르세유 당도. 기적 없자 대부분 귀환. * 8월 말 : 니콜라스의 소년 십자군, 제노바 당도. 피사 거쳐 로마 당도, 교황 인노첸시오 3세의 조언대로 대부분 귀국. 일부 성지 향함[* 제노바에서 기적 없고 시민들이 거처 제공하자 상당수 그에 남음. 이후 니콜라스와 피사 향한 이들은 이번에도 기적이 없자 일부는 2척의 선박 승선해 팔레스타인 향함. 니콜라스, 승선 안한 나머지와 로마 향함. 교황의 접견, 집으로 돌아가 좀더 나이 먹을 때까지 순례 연기하라는 조언에 수긍. 겨울동안 대부분 귀국. 한편 두번째 무리는 안코나 거쳐 브린디시 당도. 일부는 배타고 팔레스타인행 향함.] * 9월 8일 : 무아사크, 시몽에게 항복. 수비대 이단 혐의로 대거 처형됨[* 8월이라는 기록도] * 12월 9일 : 프리드리히 2세, 마인츠에서 독일 왕으로 선출됨 * 12월 13일 : 트라페준타 황제 다비트 콤니노스, 아토스 산의 수도원에서 사망. 알렉시오스 1세 집권 * [[1213년]] : 에피로스의 미카일, 베네치아로부터 디라키움 점령 / 앙리, 불가리아 차르 보릴의 딸 마리아과 결혼[* 1212년이라는 기록도 / 1월 15일, 교황 인노첸시오 3세가 니코시아의 사제들에게 듀랑 대체할 새 대주교 선출할 것을 지시 / 안티오크 공 보에몽 4세의 장남 레몽, 타르투스 성당에서 아사신에게 암살됨. 향년 18세. 구호기사단의 사주 의혹 / 인노첸시오 3세, 5차 십자군 설교 위해 관료주의적 체계 설립. 각 관구마다 설교자 지정해 특정 지역만 맡게 함. 추기경 로베르 드 쿠흐송이 프랑스에서 설교 시작 / 필리프 2세, 랑그도크 왕령지 가능성 다분한데도 아들 루이의 알비 십자군 동참 요청 거부. 아직 잉글랜드가 파문 및 성무금지령 상태에 놓여 있을 때에 침공하려는 계획 / 교황 인노첸시오 3세, 추기경 펠라지오 갈바니를 라틴 제국에 특사로 파견] * 1월 : 오헝쥬-라보르 공의회. 아라곤 국왕 페드로 2세, 레몽 7세 계승안 거부. 간섭에 항의[* 1212년 초라는 기록도. 루즈를 시몽 드 몽포르에게 넘기는 것 확정, 그의 부하들에게는 이단 영지들 주기로 결의] * 1월 15일 : 교황 인노첸시오 3세, 페드로 2세의 청원에 알비 십자군 종전 선언 * 1월 27일 : 레몽 6세, 페드로 2세에게 봉신 서약 * 2월 : 헝가리 국왕 언드라시 2세, 오스트리아 공 레오폴트 6세와 1217년 십자군 함께 출정 약속 * 4월 : 교황 인노첸시오 3세, Quia maior 칙령. 5차 십자군 제창 * 4월 19일 : 교황 인노첸시오 3세, 1215년 11월에 4차 라테라노 공의회 공표 * 5월 15일 : 잉글랜드 국왕 존, 교황 인노첸시오 3세에게 왕국 봉헌. 매년 1천 마르크 조공 대가로 파문 해지 * 7월 : 레몽 6세, 푸욜 수복 * 8-9월 : 아라곤의 페드로 2세, 시몽 대신 레몽 6세 지지하기로 결정. 2천의 기사와 북상[* 1212년 무와히드 군대와의 전투로 단련된 기사들. 한편 아라곤으로 망명했던 랑그도크 영주들이 동행. 이에 십자군에 함락되었던 도시들이 옛 주인에게 항복] * 9월 10일 : 페드로 2세, 30명의 기사들이 지키는 뮤레 포위 * 9월 11일 : 시몽 드 몽포르, 별 저항 없이 뮤레 입성. 250명의 기사 편성 * 9월 12일 : 뮤레 전투. 시몽, 아라곤-툴루즈 연합군 격파. 페드로 2세 전사, 5세 아들 하이메 1세 계승[* 9월 13일이라는 기록도. 기사 알리앙 드 루시가 페드로 2세 살해. 그 공로로 시몽으로부터 테름 등의 영지 하사받음. 이후 아라곤 왕국은 랑그도크에 개입하지 못함. 이후 시몽 드 몽포르는 교황의 지목자로서 툴루즈 백작령 뿐만 아니라 레몽 6세의 세습령인 나르본과 프로방스 변경백 영토까지 주장. 이에 레몽 6세가 충성과 가톨릭 신앙 내세우며 불평하자 교황 인노첸시오 3세는 그에게 연금 지급 제안 및 아들 레몽에게 새로운 영지 찾아주겠다고 약속] * 12월 23일 : 무와히드 칼리파 앗 나시르 무함마드 사망. 15세 아들 유수프 2세 계승 * [[1214년]] : 레몽 6세, 잉글랜드로 망명 / 에피로스 친왕 미카일 앙겔로스 암살됨. 이복동생 테오도로스 계승[* 알바니아의 베라트에서 하인에게 암살됨. 서자밖에 없어 니케아 제국에서 관료 일하던 이복동생이 계승 / 보릴, 앙리와 세르비아의 니시 포위하나 세르비아의 이슈트반 2세의 반격과 내분으로 실패] * 1월 : 아토스 산의 수사들이 교황 관할 하에 놓임 * 4월 : 장 드 브리엔, 아르메니아 국왕 레오 1세의 딸 스테파니 (리타)와 결혼. 안티오크 공 보에몽 4세와 대립 * 7월 2일 : 로슈 오 무안 전투. 필리프 2세, 존의 잉글랜드 군 격파 * 7월 27일 : 부빈 전투. 필리프 2세, 오토 4세의 독일군 격파 * 10월 : 룸 술탄 카이카우스 1세, 시노페 포위. 구원 나선 트라페준타 황제 알렉시오스 1세 사로잡음[* 5백명의 호위병과 사냥 하던 중 사로잡힘. 이후 술탄은 그를 성문 앞에 데려다 놓고 항복 종용하나 수비측은 트라브존에 알렉시오스의 아들들이 있음으로 그들의 통치를 받지 튀르크인에 굴복하지 않을 것이라 통보. 이에 술탄은 대놓고 알렉시오스를 고문, 이에 보다못한 수비측이 협상 나섬] * 10월 5일 : 카스티야 국왕 알폰소 8세 사망. 10세 아들 엔히크 1세 계승 * 10월 말 : 시노페, 룸 셀주크 측과 항복 협상 * 11월 1일 : 시노페, 룸 술탄 카이카우스 1세에게 항복. 알렉시오스 1세, 충성 서약하고 풀려남 * 12월 : 님파이온 평화조약. 테오도로스 1세, 니코메디아와 미시아 할양 대가로 앙리와 휴전[* 앙리, 그리스인들의 게릴라에 진군 멈춤. 키지쿠스, 트로아드, 아드라미티온 등이 라틴제국령. 현재의 마니사 ~ 발리케사르 일대 할양된 것. 그에 더하여 마르마라해 (프로폰티스) 해안 할양, 아크히사르 인근 칼라모스 일대는 무인지대로 설정, 국경 표시. 한편 헤라클레아에서 열린 펠라기우스 측 가톨릭 사제들과 니케아의 정교회 사제들간의 동서교회 화합 의논은 결렬됨] * [[1215년]] : 테름, 두포르, 몽레알이 알리앙 드 루시에게 주어짐 / 제르바시오, 4년의 공위 끝에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 선출됨[* 알렉산드리아에 2명의 서유럽 영주들이 무장한 기사들과 상륙하자 십자군의 공격이라 판단한 당국이 시내의 3천 서유럽인들 체포했다가 별일 없자 석방하는 헤프닝 발생 / 올리비아의 프러시아 선교 실패. 이웃 리보니아 정복의 잔혹함을 목격한 터라 기독교 개종 강력히 거부, 기독교화된 헬름노 공격. 이에 현지 사제들은 교황에게 군사 지원 모색] * 1월 : 몽펠리에 공의회. 교황 특사 피에르 디 베네벤토, 시몽 드 몽포르 툴루즈 백작 승인 * 2월 : 헝가리 국왕 언드라시 2세, 앙리의 조카 욜랑드와 결혼 * 3월 4일 : 잉글랜드의 존, 십자군 종군 서약 * 5월 : 시몽, 루이 및 교황 특사 피에르 디 베네벤토와 함께 툴루즈 향함[* 루이, 부왕의 대표로서 랑그도크에서의 왕권 재확립 위해 남하. 십자군 영주들에게 필리프 2세가 그들의 주군임을 주지시키나 시몽은 그에게 복속 혹은 원정군 지도자 자리 양보 거부. 다만 이후 시몽, 자신의 법적 정당성 확보 위해 파리 향함. 한편 최소 종군 기간인 40일 채워지고 제후들 귀국하자 루이 역시 별 성과 없이 돌아감] * 6월 1일 : 시몽, 프랑스 왕자 루이와 툴루즈 입성 / 칭기즈칸, 중도 함락 * 6월 15일 : 잉글랜드의 존, 마그나 카르타 서명 * 7월 25일 : 프리드리히 2세, 아헨에서 독일 왕으로 대관식 거행. 십자군 종군 서약 * 8월 24일 : 교황 인노첸시오 3세, 마그나 카르타 무효 선언 * 11월 11일 : 4차 라테란 공의회. 시몽 드 몽포르 툴루즈 백작위 승인, 1217년 6월 1일 십자군 출정일로[* 대주교 71명과 주교 404명 및 8백여명의 수도원장 등과 레몽 6세 참가, 사상 최대 규모. 그럼에도 격론 끝에 레몽 6세 폐위 결정됨. 다만 아들 레몽에게는 가문의 세습 영지인 프로방스 변경백 봉토 주어지는 것으로. 그외에 이단 단죄하라는 명령 집행하지 못하는 세속 군주에 대한 십자군 선포 명시. 교황 인노첸시오 3세, 알 아딜에게 예루살렘 넘기거나 전쟁에 직면하라는 서신 보냄]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